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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빠른 팀보다, 끝까지 가는 팀

ruehan··9분

가장 빠른 팀보다, 끝까지 가는 팀

응원한다는 건 어쩌면, 내가 되고 싶은 모습을 다른 누군가에게서 발견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F1을 처음 보기 시작했을 때는 나도 가장 눈에 띄는 팀부터 좋아했다.
Ferrari, Red Bull, McLaren.

F1 팬이라면 한 번쯤 그중 하나에 마음이 기우는 순간이 있다. 빠르고 화려하며, 이미 수많은 이야기를 가진 팀들이니까.

나도 그랬다.

그런데 레이스를 오래 볼수록 조금 다른 장면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가장 빠른 팀만 보는 팬이 아니라, 끝까지 가는 팀을 오래 바라보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원래 나는 강팀을 좋아했다

잘하는 팀을 응원하는 일은 비교적 쉽다.

좋아하는 이유를 설명하기도 쉽고, 다른 팬들과 이야기를 나누기도 편하다. 레이스가 끝난 뒤 하이라이트를 다시 볼 때도 마음이 가볍다.

빠른 차, 익숙한 이름, 이미 능력을 증명한 드라이버를 따라가는 일에는 실망할 가능성보다 기대할 이유가 더 많다.

팬들이 몰리는 곳에는 늘 이유가 있다.

하지만 레이스를 계속 보다 보니 순위표 위쪽보다 아래쪽에서 벌어지는 일이 보이기 시작했다.

누군가에게는 평범한 10위가 다른 누군가에게는 한 시즌의 방향을 바꾸는 결과가 됐다. 강팀이라면 실패로 기록될 성적이 작은 팀에는 분명한 진전이 되기도 했다.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나는 화려하게 이기는 팀과 함께, 쉽게 사라지지 않는 팀을 보기 시작했다.

첫 번째 팀, Haas F1

강하지 않은 상태에서도 계속 싸우는 팀

Haas는 화려함으로 설명되는 팀이 아니다.

이 팀의 목표는 종종 점수표 맨 위가 아니라, 치열한 중위권 싸움에서 밀려나지 않는 데 있다. 하지만 바로 그 점이 사람을 붙잡는다.

Haas는 Ferrari 파워 유닛을 사용하면서 Esteban OconOllie Bearman을 드라이버로 두고 있다.

드라이버

팀 안에서 느껴지는 역할

Esteban Ocon

긴 시즌을 버티는 경험과 안정감

Ollie Bearman

아직 어디까지 성장할지 알 수 없는 가능성

한쪽은 긴 시즌을 버티는 방법을 알고 있고, 다른 한쪽은 아직 어디까지 올라갈지 알 수 없다.

강팀은 한 번의 실수가 있어도 다음 경기를 기대할 수 있다. 충분한 자원과 개발 능력이 있고, 언젠가는 다시 제자리로 돌아올 것이라는 믿음도 있다.

Haas 같은 팀은 조금 다르다.

한 번의 업데이트가 기대만큼 작동하지 않으면 여러 경기에 영향을 받을 수 있고, 반대로 한 번의 좋은 전략과 드라이빙이 시즌 전체의 분위기를 바꿀 수도 있다.

그래서 이 팀의 작은 성과는 작게 느껴지지 않는다.

예상 밖으로 상위권까지 올라오는 날에는 강팀의 포디엄보다 더 큰 사건처럼 느껴진다. 남들이 보기에는 한 경기의 결과일 뿐이지만, 그 팀을 계속 지켜본 사람에게는 그 하루가 지난 몇 달의 시간을 설명해 준다.

차가 망가지고 주말 전체가 무너진 뒤에도 다음 레이스에 다시 두 대의 차를 세워 나오는 모습에는 이 팀의 본질이 있다.

Haas가 매력적인 이유는 강해서가 아니다.
강하지 않은 상태에서도 계속 싸우기 때문이다.

두 번째 팀, Genesis Magma Racing

이제 막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시작한 팀

Genesis Magma Racing은 Haas와는 다른 종류의 언더독이다.

오랫동안 생존해 온 작은 팀의 이야기가 아니라, 이제 막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시작한 신생 팀의 이야기다.

내가 이 팀을 특별하게 보는 이유에는 개인적인 감정도 있다.

한국 브랜드의 이름과 한글이 새겨진 Hypercar가 WEC의 가장 높은 클래스에서 달리는 모습은 익숙하면서도 낯설다. 그동안 화면 밖에서 바라보던 무대에 한국에서 시작한 브랜드가 자기 이름을 걸고 들어갔다는 사실만으로도 자연스럽게 시선이 간다.

WEC는 시간을 견디는 경기다

WEC는 단순히 한 바퀴를 가장 빠르게 달리는 것만으로 끝나는 경기가 아니다.

경기

대표적인 주행 시간

일반적인 WEC 라운드

6시간

Bahrain 8 Hours

8시간

Qatar 1812km

약 10시간

Le Mans 24 Hours

24시간

속도뿐 아니라 내구성, 정비, 전략, 팀 운영 전체가 함께 버텨야 한다.

첫 시즌에 쌓아 올린 과정

Genesis Magma Racing은 2026년 Imola에서 두 대의 GMR-001을 모두 완주시켰다. 완벽한 결과는 아니었지만, 새로운 팀과 새로운 차가 첫 경기의 체커기를 봤다는 것 자체가 출발점이 됐다.

두 번째 경기인 Spa에서는 #17 차량이 8위로 들어오며 팀의 첫 포인트를 얻었다. 불과 두 번째 출전 만에 만들어 낸 결과였다.

그리고 세 번째 경기가 르망 24시간이었다.

Genesis Magma Racing은 첫 르망 출전에서 한 대의 차를 끝까지 데려왔다.

완벽한 성공은 아니었다. 한 대는 멈췄고, 완주한 차량도 우승 경쟁을 한 것은 아니다.

그래도 그 장면이 의미 있는 이유는 분명하다.

르망에 처음 도전한 팀이 첫해부터 우승할 것이라고 기대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먼저 필요한 것은 스물네 시간을 경험하고, 밤을 지나고, 예상하지 못한 고장을 겪은 뒤에도 가능한 한 오래 달리는 일이다.

이후 São Paulo에서는 두 차량 모두 기술적 문제 없이 완주했다.

차량

결과

#19

13위

#17

15위

포인트는 얻지 못했지만, 처음으로 두 차량이 차고에 들어가지 않고 경기를 마쳤다. 르망에서 드러났던 신뢰성 문제를 짧은 시간 안에 개선했다는 점에서는 분명한 진전이었다.

이 팀의 첫 시즌은 순위표 한 장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렵다.

  1. 첫 경기에서 두 대 모두 완주했다.
  2. 두 번째 경기에서 첫 포인트를 얻었다.
  3. 첫 르망에서 한 대를 결승선까지 보냈다.
  4. 다음 경기에서는 두 대 모두 기술적 문제 없이 완주했다.

매 경기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이전 경기에서 부족했던 부분을 조금씩 채우고 있다.

내가 언더독에게 기대하는 모습도 바로 이런 것이다.

왜 언더독을 응원하나

언더독을 응원하면 결과보다 과정을 오래 보게 된다.

지난 경기에서 발생한 문제를 이번에는 해결했는지, 전략이 조금 더 자연스러워졌는지, 피트스톱의 실수가 줄었는지 살펴보게 된다.

다른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을 정도의 변화가 그 팀을 계속 본 사람에게는 큰 진전으로 느껴진다.

작게 전진하는 일의 의미

강팀에게 3위에서 2위로 올라가는 일은 여전히 아쉬움의 대상일 수 있다.

하지만 언더독에게는 다음과 같은 순간도 하나의 사건이 된다.

기대치가 낮기 때문은 아니다.

작게 전진하는 일이 실제로 얼마나 어려운지 알기 때문에, 그 진전을 허투루 보지 않게 되는 것이다.

물론 언더독을 응원하는 데에는 약간의 각오도 필요하다.

기대했던 업데이트가 실패할 수도 있고, 좋은 출발 위치를 얻고도 첫 바퀴에 경기가 끝날 수 있다. 한 시즌 내내 기다렸지만 결국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계속 보게 되는 이유는 응원이 결과를 소비하는 일에서 과정을 함께 견디는 일로 바뀌기 때문이다.


내가 지키고 싶은 태도

조금 더 솔직하게 말하면, 내가 끝까지 가는 사람과 팀을 좋아하는 것은 그들에게서 나와 닮은 모습을 발견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대단하게 이기고 싶다는 마음보다, 무너지지 않고 계속 가고 싶다는 마음이 더 익숙한 사람은 버티는 팀을 쉽게 지나치기 어렵다.

내가 오래 바라보게 되는 것은 이런 태도다.

화려하지 않아도 끝까지 남아 있는 것.
남들은 눈치채지 못하는 작은 진전을 스스로는 분명히 알고 있는 것.
어제의 문제를 오늘 조금이라도 고쳐 놓는 것.

그런 태도는 경기 바깥의 삶과도 닮아 있다.

나는 청주의 평범한 개발자다. 특별히 대단한 커리어를 가진 것도 아니고, 매일을 영화처럼 살아가는 사람도 아니다.

대신 작은 개선이 쌓여 결국 큰 차이를 만든다는 감각은 알고 있다.

당장 모든 것을 뒤집지는 못하더라도 이런 것들은 남는다. 그리고 그 작은 변화들이 쌓여 결국 사람을 더 멀리 데려간다고 믿는다.

그래서 언더독 팀을 보고 있으면 다른 사람의 경기를 구경하는 것만 같지는 않다.

내가 지키고 싶은 태도를 다시 확인하는 기분이 든다.

나도 그렇게 살고 싶다

Haas와 Genesis Magma Racing이 언제나 점수표를 뒤집지는 못할 것이다.

어떤 주말은 기대보다 쉽게 무너질 것이고, 어떤 시즌은 오랫동안 기다린 시간이 허무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래도 나는 계속 볼 것 같다.

이 팀들이 보여주는 것은 단순한 경기 결과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응원한다는 건 어쩌면 내가 되고 싶은 모습을 다른 누군가에게서 발견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가장 빠른 팀만 보지 않는다.

끝까지 가는 팀을 본다.

그리고 그들을 보면서 생각한다.

나도 그렇게 살고 싶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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